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통주 전투 (문단 편집) === 삼수채 전투 === 통주에는 정변의 주역인 강조가 행영도통사로서 30만의 병력을 이끌고 있었다.[* 강조가 총괄하는 고려 병력의 규모가 30만이고 실제로 통주 전투에 동원된 병력은 이보다 적었을 거란 해석도 있다. 반대로 보급 전력을 비롯한 황도의 중앙군과 기타 각지의 상비군을 포함하면 총괄 병력은 40만을 상회했으며 따라서 동원 병력 역시 과장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어 병력 규모에 대해서는 견해가 서로 상충한다.] 11월 25일, 강조는 병력의 대다수를 통주성 서남쪽 청강의 지류 3개가 합쳐지는 삼수채에 배치하였다. 이 때 고려군은 병력을 3분하여, 강조의 본대는 하천이 모이는 합수목에, 나머지 2개 부대는 각각 통주성과 인근 산을 등진 형태로 진을 쳤다. 고려군의 배치는 정석적인 포진이었다. 전쟁과 역사의 저자인 [[임용한]] 박사도 [[오자병법]]을 인용하며 하천으로 보호를 받으면서 배후 기지를 둔 포진 방식이라 평가했다. 물론 동절기여서 하천 자체가 흐르지는 않았지만 하천에 접한 언덕이 자연 방벽 역할을 해준다는 점을 활용할 수 있었다. 서전에서 고려군은 거란의 주력인 [[기병]]을 저지하기 위해 검차(劍車)를 전면에 배치, 거란군의 돌파를 막아내는 전과를 올렸다. 이에 강조는 거란군을 얕잡아보고 지휘를 태만히 하는 실책을 저질렀다. >강조는 군사를 이끌고 통주성 남쪽으로 나와 전군을 셋으로 나누어 강을 사이에 두고 진을 쳤다. 한 부대는 통주의 서쪽에 군영을 두고 삼수(三水)의 합류점에 웅거하였으며 강조는 그 가운데에 머물렀다. 한 부대는 통주 근교의 산에 군영을 세우고 다른 한 부대는 통주성 부근에 군영을 두었다. 강조가 검차(劒車)를 일렬로 배치하여 두고 거란군이 쳐들어오면 곧 검차로 함께 공격하니, 모조리 물리치지 않음이 없었다. 거란군이 여러차례 물러나니, 강조는 마침내 적을 얕보는 마음이 생겨 사람들과 [[알까기|탄기]]를 했다[* 국역본에서는 그냥 '바둑을 두었다'라고 번역했다. 彈棊라는 말이 '누군가와 바둑을 두고 있다'는 의미로도 쓰이기 때문인데, 이 부분은 국역본과 달리 '탄기를 했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兆引兵出通州城南, 分軍爲三, 隔水而陣. 一營于州西, 據三水之會, 兆居其中. 一營于近州之山, 一附城而營. 兆以劒車排陣, 契丹兵入, 則劒車合攻之, 無不摧靡. 契丹兵屢却, 兆遂有輕敵之心, 與人彈棊. >---- >《고려사》 반역열전 1 이렇게 방심한 강조가 탄기를 하는 동안 거란의 장수 야율분노와 [[야율적로]]가 삼수채에 주둔 중인 본군을 급습했다. 기병의 치고 빠지기로 고려군의 진을 뒤흔들어 놓은 것. 보초병이 내습을 알렸지만 강조는 "[[허세|입안의 음식처럼 적군이 적으면 오히려 좋지 않으니 많이 들어오게 놔두라]]."며 이를 일축, 결국 진을 돌파한 거란군에 의해 강조 본인이 생포되고 만다.[* [[고려사]]에서는 이 때 강조가 [[목종(고려)|목종]]의 혼령이 일갈하는 것에 놀라 [[투구]]를 벗고 무릎을 꿇었다고 기록하였다. 사실이라고 가정하면, 강조가 목종을 떠올리며 자신의 실수를 후회한 것을 애둘러 표현한 걸로 보인다.] 더구나 이 강습돌파로 행영도통부사 이현운, 행영도통판관 노전, 감찰어사 노이, 양경, 이성좌 등도 덩달아 포로로 잡히고, 행영도병마부사 노정, 사재승 서숭, 주부 노제 등이 전사하는 등 고려군의 수뇌부가 일거에 무너지면서 고려의 주력 [[야전군]]이 싹쓸이당하게 된다. 대다수의 고려군들은 곽주 방면으로 도주하다가 3만여 명이라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전근대의 전투에선 진형이 무너지고 나서 사상자가 대거 발생하게 된다.] >거란 임금이 군사를 동산(銅山) 아래로 이동시키자, 강조(康兆)가 군사를 이끌고 통주성 남쪽으로 나와 싸우다가 패전하여 포로가 되었다. 행영도통부사(行營都統副事) 이현운(李鉉雲)과 행영도통판관(行營都通判官) 노전(盧戩) 및 감찰어사(監察御史) 노의(盧顗)·양경(楊景)·이성좌(李成佐) 등도 모두 포로가 되었고, 행영도병마부사(行營都兵馬副使) 노정(盧頲), 사재승(司宰丞) 서숭(徐崧), 주부(注簿) 노제(盧濟) 등이 진영에서 전사하니 아군은 큰 혼란에 빠졌다. '''거란 군사들이 승세를 타고 수십 리를 추격해와 3만여 아군의 목을 베니 버려진 군량과 병장기를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 >고려사, [[양규]] 열전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671110&cid=62131&categoryId=62163|##]]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